간증

위트니스 리가 자기 사역 가운데 여러 차례 나누었던 개인적인 간증을 간추렸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자기 간증을 한 권으로 낸 적이 없고, 사역하는 가운데 여러 차례 나누어 말했습니다. 아래는 그 가운데 개인적인 장면들을 간추린 것입니다. 앞 쪽의 생애와 사역이 시기별 기록이라면, 이 쪽은 그가 자기 입으로 말한 대목들입니다. 원문 전체는 쪽 끝 링크에서 영어로 보실 수 있습니다.

구원받고 추구함

그의 어머니 쪽은 외증조부가 남침례교인이었고, 어머니는 미국 남침례교 선교 학교에서 공부하여 십대였던 1885년 무렵 침례를 받았습니다. 둘째 누이가 구원을 체험한 뒤 그를 위해 기도하며 중국 독립 교회의 목사에게 인도했고, 그 목사가 여러 차례 찾아와 주일 집회에 나오도록 권했습니다.

구원받은 날부터 그는 성경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이 꿀보다 달았다고 그는 시편 19편 10절과 119편 103절을 들어 말했습니다. 말씀이 그를 먹이고 삶을 바꾸어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게 했습니다. 그는 구할 수 있는 성경 해설서를 닥치는 대로 모았고, 곧 고향의 형제회(벤자민 뉴턴 계열) 모임에 인도되어 구원받은 해부터 여러 해 동안 참석했습니다.

성경을 철저히 알고자 찾던 중 고향에 『샛별』이라는 그리스도인 간행물이 들어왔습니다. 구할 수 있는 호는 모두 구해 읽었는데, 거기서 워치만 니라는 이름으로 실린 글들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지부의 뉴턴 형제회가 펴내던 『내 발의 등』에 실린 그의 글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무렵 그는 워치만 니에게 성경에 관해 묻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이것이 두 사람의 첫 접촉이 되었습니다.

지식에서 생명으로 돌이킴

그와 두 형제는 자기들이 떠나온 교파에 워치만 니를 초청하도록 제안했고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시절 중국 북부에는 오순절 운동이 강했고, 워치만 니가 말한 신학교도 그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 운동의 낯선 실행들을 보았습니다. 첫 집회를 마치고 함께 걸어오며 그가 이런 식의 집회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고 묻자, 워치만 니는 신약에는 집회를 어떻게 하라는 규례가 없다는 뜻으로 답했습니다.

같은 기간 어느 오후, 그는 기숙사 방에 남아 주님과 시간을 보내다가 이사야 44장을 읽으며 자기를 섬김으로 부르시는 음성을 깊이 느꼈습니다(사44:21-23). 집회가 끝난 뒤 워치만 니는 지부로 돌아와 그의 집에서 이삼 일을 머물렀고, 두 사람은 주님의 권익에 관해 뛰어난 교통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그 며칠이 주님의 달콤하심과 사랑스러우심과 새로우심을 깊이 각인시켰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 새로운 출발이 되었으며, 지식에서 생명으로 근본적으로 돌이키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떠나기 전날 워치만 니는 자기가 떠난 뒤 아무 일도 벌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남들이 그를 따르는 것으로 여길까 해서였습니다.

섬김으로 부르심

고향에 교회가 일어난 뒤에도 그는 직업을 유지하면서 집회를 돌보았습니다. 교회가 시작된 지 일 년이 지난 1933년에는 일이 크게 늘어 그의 시간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교회 형제들 가운데 그와 동생만이 넉넉한 수입이 있었기에 교회의 필요 대부분을 두 사람이 남모르게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세 주간의 씨름 끝에 8월 21일 밤, 그는 기도 모임을 마치고 두 인도하는 형제에게 사정을 말한 뒤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응답했습니다. 이튿날 사직하고 우체국에 들렀더니 일본 점령하의 만주 장춘에서 온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받은 첫 초청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열이레를 지내는 동안 이번에는 전 직장 총지배인의 편지가 왔습니다. 보내 줄 수 없으니 승진시키고 급여를 올려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상해에서 부친 워치만 니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주님과 씨름하던 한가운데인 8월 17일자였습니다.

사역에 들어감

1933년 10월 상해에서 워치만 니는 그를 손님으로 맞아 넉 달가량 함께 지내며 여러 방식으로 그를 온전케 했습니다.

첫째, 생명으로서 주님을 알도록 도왔습니다. 그전까지 그는 주님을 사랑했고 성경에 관한 교리적 지식도 많았지만 생명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오후 두 사람이 말없이 앉아 있다가 워치만 니가 흔들의자에서 물었습니다. “인내가 무엇입니까?” 너무 단순한 질문에 그는 당황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괴로워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눈이 열려,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의 인내이심을 보았습니다.

둘째, 워치만 니가 구원받은 해부터 그때까지 주님께서 그와 함께 움직이신 역사를 들려주었습니다. 셋째, 일 세기부터 당시까지의 교회 역사를 짚어 주었습니다. 넷째, 성경을 아는 살아 있는 길을 붙잡게 해 주었습니다. 형제회에게서 문자의 길로 성경을 아는 법을 배웠다면, 워치만 니에게서는 생명의 길로 아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어느 오후에는 그의 방에 들어와 헌책 두 묶음을 침대에 던져 놓고 “자네 책일세” 한마디만 남기고 나갔는데, 그중 하나가 다비의 『성경 강요』 다섯 권이었습니다.

아울러 워치만 니는 그를 상해 지방 교회의 일과 사역에 참여시켰습니다. 당시 상해 교회는 두 집회소에서 모였는데, 그에게 둘째 집회소의 집회를 맡겼습니다. 각지에서 온 질문 편지 한 묶음을 건네며 대신 답장하라고 한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복음 집회에서는 모두가 워치만 니의 메시지를 기대하던 자리에 그가 세워졌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16장으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말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워치만 니가 문 뒤에 서서 그 말을 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계속 시험받고 있었음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1934년, 상해에 온 지 넉 달쯤 되었을 때 워치만 니가 찾아와 동역자들의 뜻을 전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상해로 옮겨 함께 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보내심 받음

1948년 11월, 워치만 니는 중국에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를 두고 기도하고 교통하며 분명한 인도를 구하려고 상해의 모든 동역자를 긴급히 불러 모았습니다. 그때 위트니스 리는 항주에서 이주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북중국의 정세가 바뀌자 워치만 니는 청도의 몇 형제가 가족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하여 주님의 일을 넓히도록 하자고 그와 교통했습니다.

동역자 집회 뒤에도 워치만 니는 그에게 새 집회소 건축을 감독하도록 상해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이듬해 2월 둘째 동역자 집회가 열릴 때 그가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자기만 나라를 떠나야 하고 나머지는 남아 주님의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느냐고. 두 사람은 대북의 다섯 형제에게 편지를 보내 그곳 교회가 온전히 세워지도록 그들을 장로로 세웠습니다.

두 달 뒤 복주의 훈련소에서 전보가 왔습니다. 상해의 모든 책임을 그곳 인도하는 이들에게 넘기고 즉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대로 했습니다. 둘째 훈련을 마친 뒤 워치만 니는 훈련생 셋을 대만으로 보내 그의 일을 돕게 했습니다.

이 쪽은 www.witnesslee.org — Witness Lee's Testimony 의 내용을 한국어로 간추린 것입니다. 본인의 회고 전문은 링크에서 영어로 보실 수 있습니다. © Living Stream Ministry. All rights reserved.

이 페이지의 성경 인용은 「한국어 회복역 성경」(한국복음서원)을 따릅니다.